7급 공무원 퇴사 2년 차 시작 - 1
2022년 8월 1일, 약 7년 10개월가량 몸 담아 온 공직 생활을 그만두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갓 성인이 된 후부터 몸 담은 곳이라 더 의미가 큰 기간이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자 성숙한 성인이 되기까지(아직 되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오래된 기간만큼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곳이다.
공무원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공무원이라는 걸 이야기하면 대체로 나를 좋게 보았다. '성실하다. 믿음직하다. 똑똑하다.' 등 분명 나는 나에 대해 이런 생각이 들게끔 어필하지 않았는데도, 직업이 공무원이라는 걸 이야기하면 저절로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었다. 특히 5060 세대의 분들이 유독 그렇게 생각해 주셨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대체로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었다. 아마도, 어린 나이에 공무원이 되기까지의 과정들, 공무원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들로 인해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추측된다. 즉, 직업적 의미에서의 공무원이 가진 긍정적인 이미지들로 나를 알아서 포장해 주었다.
공무원이 대단한 직업이거나 우월한 직업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그저 이런 자동 포장의 과정들이 편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무원을 그만두고 나서 별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은 지금 상황은 완전 반대가 되었다. 나를 증명할 하려면 말이 길어진다. 만약 당장 결혼을 허락 받기 위해 여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고, 어떤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지 전부 말해야 한다. 내 모든 걸 다 말해도 "그래 내 딸을 맡겨도 되겠구나" 라는 반응이 돌아올 가능성은 매우 낮다. 증명된 게 없으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설득의 수단으로써 공무원이란 직업이 효용이 크다는 의미로 말하는 거다.
공무원을 퇴사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여행이다. 제주도에서의 한 달, 그 후 곧바로 유럽 한 달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한국인들 왜 이렇게 많아?" 다. 좀 더 편협하게는 "다들 일 안 하나?"로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 공무원을 할 때 내 주변 사람들도 전부 직장인이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하게 사는 줄 알았다. 평일동안 열심히 일하고, 주말에 휴식하고(주말에도 출근할 때가 있었지만), 유럽 같은 긴 여행은 몇 년에 한 번 겨우 갈까 말까, 여름휴가 때 길면 일주일 휴가 가는 게 끝인 그런 삶.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유럽에 한 달 동안 여행을 갈 때 정말 큰 마음을 먹었어야 했다. 영어도 잘 못하고, 혼자 가는 게 두렵기도 하고, 여행을 잘할 수 있을지 불안하기도 했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렘보다는 불안함이 더 컸던 거 같다. 8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이런 여행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현상일 터. 그런 불안함을 시작으로 여행을 하면서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상을 발견한 거다.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정말 많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 한정이지만) 내가 알고 있던 삶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퇴사하고 온 사람, 대학생, 부모님 모시고 온 사람, 연인과 함께 온 사람 등 여행 구성원들이 다양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삶의 방식이 다양했다는 점에 놀랐다. 퇴사하고 온 그 사람은 퇴직금을 다 쓸 때까지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고, 군대 말년 휴가 때 유럽에 온 친구도 있었다. 한 대학생은 자신이 유럽 여행을 언제 해보겠냐는 생각에 휴학하고 왔고, 이직할 때 중간에 여행할 기간을 만들어서 온 사람, 사업하는 사람, 어학연수 하는 사람, 교환학생 등 다양한 삶의 방식을 만날 수 있었다.
오히려 나와 내 주변 사람들과 같은 평범한 직장인을 만나기 더 어려웠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내가 유럽 여행을 떠날 땐 10월~11월이었으니 직장인들이라면 연말이라 일에 파 묻히는 시기고 휴가를 떠날 생각조차 못하는 시기일 테니까 말이다. 내가 만약 공무원을 퇴사하지 않고 유럽에서 그들을 만났다면 내가 살아온 방식을 기반으로 아마도 이렇게 그들을 판단했을 것이다. 대학생은 '집이 잘 사나?', 군인이었던 그 친구는 '난 왜 말년 휴가 때 여행 올 생각을 못했지? 대단하네, 근데 여행 올 돈은 어떻게 모았지? 군인 월급 올랐다더니 좋겠네', 사업하는 사람은 '돈 많아서 좋겠다.'. 즉, 내 기준대로 판단만 하고, 그 삶의 방식으로부터 하나도 얻지 못했을 거 같다. 한국에 돌아가도 난 공무원으로 생활을 할 게 분명하니. 애초에 퇴사하지 않았다면 유럽에 그렇게 길게 가지 못했을 거 같다.
다행히, 그들을 그동안 내가 우물 안에 있었던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그만큼 삶의 방식이 다양한데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공무원이 아니어도, 좋은 직장(대기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나는 분명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내 능력을 발휘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퇴사한 후 여행을 다녀온 게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공무원 퇴사 2년 차에 접어든 지금 전보다 많이 불안하지만 공무원이었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만약,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모른 채로 현재까지 지냈다면 분명 퇴사를 후회했을 것이다.
퇴사 2년 차에 접어든 지금까지 무얼하고 살았는지 복기해 보겠다. 퇴사한 2022년 9월부터 여행을 하고, 앞서 말한 값진 깨달음을 얻었다. 연말, 부산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집에서 친구의 일이 어떤지 보러 갔다가(내가 이 일을 해도 좋을지) 지인의 전화를 받는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하는 걸 안 지인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피트니스 회사에 매니징 업무를 하는 매니저로 일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추천을 해주었다.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분야의 일이라서 흥미가 생겨 면접을 보고, 23년 1월 2일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 후 1년 동안 피트니스 업계에서 일을 하고, 24년 1월부터는 다시 무직이 된다.
피트니스 업계에서의 1년을 이야기하려면 많은 분량이 필요할 거 같다. 감히 말하건대, 공무원 8년 동안보다 많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운동이 습관화되고, 사업에 더 가까워지고, 사람을 관리하고, 유튜버와 같은 전혀 각기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만났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인연'이 크게 남았다.
24년이 시작한지 어느덧 음력으로도 많이 지난 현재, 솔직히 불안하다.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서 그런 거 같다. 내가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얼 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불안감을 극복하려고 한다. 극복을 위해서 그만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한다. 즉, "Stop thinking, Just do"가 올해의 한 문장이다.
'일상 속 사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상 속 사유] 웹툰 잔불의 기사 전략적인 초보자 같은 행동 (1) | 2024.05.02 |
---|---|
강연을 통해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 (0) | 2024.03.27 |
사소한 감동 (0) | 2024.03.21 |
자기 이해│가장 어려운 질문 What I want?, What I have? (0) | 2024.03.05 |
일상 속 작은 우연-잃어버리지 않았지만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다. (0) | 2024.03.03 |